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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 세계(2)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인
    고대 근동 문화 2023. 5. 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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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 세계(2)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인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인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마 특별한 의미로 동방의 “거주자”들보다 서방의 거주자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동방 거주자들은 팔레스타인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그들은 외방의 거주자라기보다는 하나의 연속체로 보일 지경이었다.

    영원히 기억될 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흩어져 사는 유대인”이 두 부류, 즉 동방 혹은 유브라데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유대인과 서방 혹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분명히 나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열에서 동방 거주자에는 “바대Parthia, 파르티아인, 메대Media, 메디아인, 엘람Elam인, 메소보다미아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포함되고, “유대”는 그 중앙에 있으며, “그레데Cretes인과 아라비아Arabia인들”은 각각 서방과 동방의 가장 먼 지방의 디아스포라를 대표하는 셈이다.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방 거주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개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 “헬라파 유대인들” 혹은 “헬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편 “바벨론과 다른 많은 관할구에 거주하고 있던” 유브라데강 건너편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수리아인들과 함께, 그들이 사용하는 공통 언어의 이름을 따라서 “히브리인”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헬라인”과 “히브리인”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언어가 다르다는 사실 이상으로 깊은 것이었으며, 그들의 전체적인 생각의 방향에까지 그 차이가 미쳤다. 그리스 세계에는 성격상 유대인이라 해도 빠져 나오기 불가능한 정신적 영향력이 퍼져 있었다. 그 정신은 동시에 이교주의로부터의 분리와 예루살렘과의 연결만큼이나 그들의 사명 완수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런 적대적 요소들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동방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과 동일하게 유대인이 되기를 강하게 원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상의 순결과 전통적 신앙, 그리고 거기에 수반된 모든 것에 대한 자존심으로 헬라인에 대한 멸시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헬라인을 가리켜 바벨론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보다도 훨씬 열등하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런 감정과 의구심은 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심지어 이 사실은 초창기 사도 교회에서도 이런 지역적 편견에 근거한 불쾌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한 의심 때문에 헬라인과 히브리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벨론인들에 대해 내린 평가는 헬라인에 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한 견해에 따르면, 바벨론은 “수리아”나 훨씬 북쪽의 “안디옥”과 함께 이스라엘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나라는 “팔레스타인”이라 불리는 “그 땅”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바벨론은 예외적으로 그 땅의 일부로 간주되었다.8 수리아와 동편으로 티그리스강히브리 명칭으로는 힛데겔강-역자 주 둑까지 이르는 메소보다미아는 다윗 왕이 점령했던 영토였던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그 지역은 그들의 관념 속에서 영원히 이스라엘 땅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거했던 곳 중에 가장 넓고 부유한 지역이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강 사이였으니, 후에 저자들이 이 지역을 가리켜 “이스라엘 땅”이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다.

    이곳 나하르 말카Nahar Malka, 즉 티그리스강에서 유브라데강으로 통하는 “왕의 운하”에 위치한 네하르다Nehardaa는 가장 오래된 유대인 거주지였다. 그곳은 여고냐 왕이 성전에서 가져 온 돌로 지었다고 전해지는 회당을 자랑했다. 성전을 짓기 위한 막대한 기부금이 이 견고한 성에 모아졌으며, 그 돈은 수천 군인의 호위하에 목적지로 운반되었다. 유대인의 또 다른 자금 도시 중 하나는 북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니시비스Nisibis였다. 이교도들의 탐욕을 극히 자극했음이 분명한 이런 부가 이 도시들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가 팔레스타인으로 운반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거기에 유대인 인구가 얼마나 많았으며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일반적으로, 이 동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에 관해 기억해야 할 극히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처음에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다음에 에스라의 인도 하에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온 원래 인구는 약 50,000명에 이르는 소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귀환한 유대인은 숫적으로만 소수가 아니었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은 뒤에 남았다.

     

    필론이 실제적으로 동의하는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수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많은 수의 사람이 유브라데강 건너편 지역에 살고 있었다. 군중 봉기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의 숫자에 미루어 짐작해도(셀레우키아Seleucia에서만 50,000명), 이 숫자는 별로 과장이 아닌 것 같다.

    후기 전통에 의하면, 바사(페르시아) 제국에 유대인 인구가 너무나 밀집되어서 고레스cyrus 왕은 자기 나라 인구가 지나치게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더 이상의 포로 귀환을 막았다고 한다. 그렇게 크고 집약된 인구는 곧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바사 제국하에서 좋은 대우를 받던 그들은 그 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계승자인 알렉산더Alexander의 호의를 얻었다. 다시 마케도니아-시리아 제국이 파르티아Parthia, 개역 성경 “바대” 제국으로 계승되자 유대인은 로마에 대한 그들의 국가적 저항으로 동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주후 40년경까지도 로마 사절은 유대인의 적대감을 일으킬 만한 일을 피했다.

     

     



     

     

    하지만 이렇게 호의를 입은 지역이라도 그들이 전혀 박해를 받지 않고 지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곳에서도 원주민에 의한 피의 박해가 있었음을 역사는 한 번 이상 기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방과 수리아 지역은 그들이 마케도니아-시리아 제국셀레우코스 왕조, Seleucidæ의 호의적 통치하에서 방랑하던 곳이다. 그곳의 형제들은 실로 현저한 고라Golah, 즉 “흩어져 사는 자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명절 월력festive calendar의 규정을 위해 산정에서 산정으로 보내는 봉화 신호를 통해 매달의 시작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비록 나중에는 그 일을 위해 직접 사람을 보냈지만 말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동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은 동일한 지평 위에 서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조국보다도 더 높은 지평 위에 서 있었다. 십일조와 테루못Terumoth, 즉 준비된 상태의 첫 열매를 바치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으며, 비쿠림Bikkurim, 즉 신선한 상태의 첫 열매는 수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운반되었다. 그 흙까지도 더럽혀진 이방 나라들과는 달리 수리아의 흙은 팔레스타인의 흙과 마찬가지로 정결한 것으로 선포되었다.

     

     



     

     

    가문의 순결성에 관한 한 바벨론 사람들이 실제로 팔레스타인 형제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에스라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갈 사람들을 취할 때, 고운 가루처럼 순결한 사람들을 뒤에 남겨 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들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다음과 같다. “유대 거민의 가계의 순수성에 관해서 팔레스타인에 비교한다면 다른 모든 나라는 누룩 섞인 가루 반죽과 같다. 그러나 바벨론과 비교한다면 팔레스타인 또한 그러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유대인 인구가 혼잡을 피하고 순수성을 유지한 경계를 추적해 낼 수 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 점에서 에스라에게 큰 공로가 돌아갔다. 일반적인 과장법으로, 가계에 대한 모든 연구와 탐구를 한데 모은다면 낙타 수백 마리분의 짐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가계의 순결성을 확보하기 위해 완전하고 정확한 기록을 보존하는 일에 지극한 신중함과 노력이 기울여졌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한 에스라의 행동과, 요세푸스가 이 점을 얼마나 강조했는가16 하는 것에서 가계의 순수성에 그들이 부여한 중요성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제사장 가계의 공식 기록은 성전에 보관되었다. 그 외에도 유대 권세자들은 일반적인 공식 명부를 소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헤롯은 그것을 태워 버릴 것을 명했다. 물론 그 이유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 랍비는 그날로부터 유대인의 영광이 감소되었다고 통곡했다!

    동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이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가계의 순수성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모든 것을 바벨론인인 에스라에게 빚지고 있었는데, 전통에 의하면, 만약 율법이 수여되는 영광이 이전에 모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에게 주어졌으리라는 것이다. 탈무드가 그의 공으로 돌린 다양한 전통적 법규를 제외해도, 우리는 그가 선을 위해 행한 일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다.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유대 국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심지어 말하고 쓰는 언어까지도 이전과는 달랐다. 옛날에 사용하던 글자 대신 포로들은 돌아오면서 지금은 널리 사용되는, 이른바 정방형 히브리 글자를 가져 왔는데 그것이 점점 일반화되었다.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제 히브리어가 아닌 팔레스타인과 바벨론 모두에서 공히 사용하는 아람어였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에서는 서방 방언이고 바벨론에서는 동방 방언이었다.

     

    실은 보통 사람은 순수 히브리어를 몰랐으며, 결국 순수 히브리어는 학자와 회당의 언어가 되었다. 심지어 공공 예배에서 읽혀지는 성경 구절과랍비의 강설을 대중의 언어로 통역하는 메투르게만Methurgeman, 즉 통역가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탈굼Targum, 복수형은 Targumim, 즉 의역 성경이 생겨났다.

     

    물론 처음에는 의역 성경이 원래의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없도록, 통역가가 자기의 번역을 읽거나 탈굼을 기록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요나단이 선지자의 글에 대한 자신의 탈굼을 가지고 나왔을 때, “나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준 이 사람이 누군가?”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탈굼은 매우 일찍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서로 상이하고 가끔 잘못된 번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필요로 했다. 이런 연유로 주후 2세기 말 전에 그것의 사용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바로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두 권의 탈굼의 기원이다. 하나는 오경에 대한 것으로 옹켈로스Onkelos라고 불리며, 다른 하나는 웃시엘의 아들 요나단이 쓴 것으로 생각되는 선지자의 글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이름들은 가장 오래된 탈굼의 정확한 저자의 이름이 아님이 분명하다. 오늘날 가장 오래된 탈굼으로 알려진 것은, 실은 후기에 보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던 기존의 것을 교정한 탈굼이다. 하지만 비록 이런 글들의 기원이 팔레스타인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형태의 탈굼은 바벨론 학파의 산물임을 주목해야 한다.

     

     에더스하임알프레드, 복음을 위한 준비; 탄생에서 세례까지, ed. 황을호 et al., trans. 황영철 and 김태곤, 1판 ed., vol. 1, 메시아 -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시대 (서울 종로구 송월동 32-43(110-101): 생명의말씀사, 2012), 6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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