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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레스타인의 상황(1)-그 땅의 유대인과 이방인들-그들의 상호 관계와 감정-“분리의 벽”
    고대 근동 문화 2023. 5. 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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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의 상황-그 땅의 유대인과 이방인들-그들의 상호 관계와 감정-“분리의 벽”

     

    유대교와 그리스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자기가 살던 이방 나라를 떠나서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순례자는 마치 다른 세계의 문지방을 넘어온 것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예절, 관습, 제도, 법률, 생활, 아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자체가 전혀 달랐다. 그 모든 것은 전체에 스며 있는 종교적 개념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종교는 삶의 모든 관계 속에 침투해 있었다.

     

     



     

     
    나아가서 그 종교는, 적어도 성전이 서 있는 한,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그 땅과도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땅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쉐키나가 머물거나 나타날 수 없었으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나 혹은 “조상들의 공로”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언의 영이 팔레스타인이라는 경계를 벗어난 바깥에 주어질 수 없었다. 정통 유대인에게 정신적 영적 지평은 팔레스타인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그 땅”이었다. 바벨론을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그 땅 바깥”이었다.


    그 땅에 대해서는 특별히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유대인이 느끼기에 성결의 표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 백성과는 무관하게 땅 그 자체가 거룩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땅을 그렇게 거룩하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은 불필요하게 보이는 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명령과 법규를 내리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의로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또한 이스라엘이 “조상들의” 공로2 특히 아브라함의 공로를 소유함으로 비록 그 후손들이 도덕적으로 말해 시체 같더라도, 아브라함의 공로가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그 공로가 후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하나님은 마치 왕이 자기 아들의 출생을 미리 예견하고 준비하듯이, 이스라엘이 세상에 나타나기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을 위한 준비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위함이요 그들의 공로를 위함이었다. 아니 이스라엘은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다른 것을 창조하려고 생각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었다.


    만약 이런 구분이 지나치더라도, 그것들은 최소한 이스라엘의 공로에 대한 평가로는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스라엘의 공로는 율법적인 경건을 엄격하게 지키는 일이 포함된 “선행”에서 나오며, 또 “율법을 연구함”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율법을 연구하는 것”만이 지고의 공로로 인정되었다. 지식은 실천의 방향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했다. 그것은 암 하-아레츠Am ha-arets, “촌사람”, 평민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땅을 파는 삽과 가장 고귀한 왕관을 바꾼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룸의 학파”the school of Arum, 즉 현자들, 곧 “세상의 큰 자들”이 긴 세월에 걸쳐 그 지식을 확정해 놓았고, 그 연구는 행위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지상에 있는 선택된 그의 자녀들에게 맡겨진 연구에, 하늘에 계신 그들의 전능하신 하나님까지도 동일하게 전념하시므로, 어떻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8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특별히 부르신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어디 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견지했던 견해를 이해하려면, 혹은 당시의 유대인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가졌던 무한한 이질감을 조금이라도 알려면, 자신을 그 당시 분위기 속에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방인의 모든 생활 방식과 사상과 관계에 대해 유대인이 가졌던 것, 즉 조소가 포함된 혐오, 율법의 문자 경배, 자기 혈통에 대한 자긍심, 이 자긍심보다 더한 지식에 대한 자긍심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해될 것이며, 그와 동일하게 이방인인 그들 자신과 자신들의 이상과는 너무도 다른 메시아의 주장에 대한 그들의 반감도 이해될 것이다.


    메시아의 최초 선포는 소망을 불러왔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곧 감정의 허사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기적도 얼마 동안은 사람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그어 놓으신 그 나라의 경계선은, 유대인이 설정하고 배열한 나라의 현재와 미래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만약 메시아가 유대인 안으로 들어오기로 동의하시고 그들이 지적한 것을 완성하고 실현하기로 하셨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아니, 일단 그들의 근본 사상을 인정한다면 거기에는 아름답고, 참되고, 그 세부적인 내용에서 규모가 웅장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바로 그 근본적인 사상에서 차이가 벌어진다. 거기에는 어떠한 개혁이나 진보의 가능성도 없었다. 이방 세계와 이스라엘과 관련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돌이킬 수 없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세상의 창조시의 모습으로, 아니 창조 이전의 결정대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토라는 실은 천지가 창조되기 2,000년 전부터 존재했다. 족장들은 연구를 위해 여러 기관을 갖고 있었으며 모든 법규를 알고 준수했다. 또한 전통주의는 그 시기와 권위에서 율법 그 자체와 같은 기원을 갖고 있었다. 이방 민족의 경우,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제공하셨지만 그들이 거절했으므로, 비록 그들이 후에 회개해도 그것은 가식임이 입증될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모든 변명도 무익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그들의 선행이 비록 미미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선행을 한데 모음으로 마침내 큰 선행이 될 것이다. 사람이 친구에게서 빚을 받을 때 한 번에 조금씩 받는 것처럼, 하나님도 사람의 죄 값을 조금씩 받아 내실 것이다. 랍비들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지체들이 함께 고통하고 기뻐하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저 숭고한 상징을 채택했으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전혀 다른 영적인 의미로 취했다.

     

     



     


    만약, 이스라엘의 탁월함이 그 땅 때문이고, 그 땅이 탁월해진 것도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함 때문이라면, “경계가 협소해진다”는 랍비들의 불평은 근거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나라의 정확한 경계를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무엇이 그 나라에 속하느냐 하는 질문은 지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의식儀式적이고 신학적인 고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인접한 이웃아스글론(Ascalon, 아시켈론)의 경우뿐 아니라, 도시의 성벽 자체악고(Acco, 아크레)와 가이사랴(Cæsarea, 카에사레아)의 경우는 팔레스타인 것으로 인정되는 반면에, 도시 그 자체는 거룩한 구역 “바깥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원래 그것을 소유한 자가 누구며,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의식적 의무가 거기에 부과되어 있느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관념상으로, “약속의 땅”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포함한다. 비록 그들이 완전히 소유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더욱 제한된 의미에서 그 “땅”은 “애굽에서 올라온 그들이 취한 지역들, 곧 거십Chezib, 악고에서 북쪽으로 세 시간 정도 거리에서 강(유브라데)까지, 그리고 아마나Amanah에 이르는 지역”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유대의 가장 번영했던 시기에 다윗이 정복했던 지역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메소보다미아, 수리아, 소바Zobah, 조바, 아킬라Achlah 등지까지 확대된 곳이다. 이 전 지역에 대해 후에 소리아Soria, 혹은 수리아라는 일반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지역이 가장 협의의 실제 의미로, “그 땅” 주변의 내부 띠inner band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땅의 외부 띠outer band는 이스라엘이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애굽, 바벨론, 암몬, 모압 지역이었다. 이 땅들은 이방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이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른바 테루못Terumoth, 즉 준비된 상태의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이 당연했으며, 한편 소리아는 “제2의 십일조”와 식물의 제4년째 소출을 드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팔레스타인의 의무를 거의 모두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에 요제搖祭로 드릴 곡식단과 오순절에 쓰일 두 덩이 떡을 위한 곡식은 오직 거룩한 땅에서 재배된 것이어야 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땅에서와, 거십에 이르기까지 바벨론에서 올라온 자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라고 개괄적으로만 규정되었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볼 때,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새로운 “종파”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불렸으며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진 안디옥이 “그 땅” 북쪽 경계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교회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우려고 애쓴 유대교 열심파들이, 그들의 최초의 노력을 외부 팔레스타인으로 간주된 소리아에 집중시킨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에더스하임알프레드, 복음을 위한 준비; 탄생에서 세례까지, ed. 황을호 et al., trans. 황영철 and 김태곤, 1판 ed., vol. 1, 메시아 -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시대 (서울 종로구 송월동 32-43(110-101): 생명의말씀사, 2012), 18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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