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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상황(2)-유대인과 이방인들-이교 성전, 경기장, 풍습-“분리의 벽”고대 근동 문화 2023. 5. 4. 15:24반응형
이교 성전, 경기장, 풍습
이런 각각의 도시와 지역에는 그들의 특별한 신과 종교 의식이 있었다. 어떤 것은 그 지역의 전통에 의해 결정됐지만 그 지배적인 성격은 헬라적인 종교와 수리아적 종교의 혼합이었다. 하지만 헬라적인 것이 더 선호되었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짐작한 대로다.
한편 헤롯과 그의 후계자들은 로마 제국과 황제에 대한 숭배를 장려했는데, 이것은 주로 동방에서 실행되었다. 이를테면, 헤롯이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가이사랴에 세운 성전에는 황제를 제우스Zeus로, 로마를 헤라Hera로 표현한 입상들이 있다.15 그는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이교주의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백성 앞에서 변명하곤 했다.
하지만 비록 그의 종교적 성향이 그 방향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백성을 헬라화시키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가이사랴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루살렘에도 경기장과 원형 경기장을 짓고 4년마다 거대한 비용을 들여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경기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헤롯은 로마 지배의 상징으로 예루살렘 성전 대문에 거대한 황금 독수리를 세웠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성전 입구 위에 있는 거대한 포도나무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은 물론 군중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심지어 모반과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16 비록 후에 빌라도가 황제의 상像들을 예루살렘에 들여오려고 했을 때나 칼리굴라Caligula의 입상을 성전에 두려고 했을 때 백성들이 보였던 것처럼 전체적이고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비록 탈무드가 경기장이나 원형 경기장에 참가하는 것에는 전적으로 반대하지만 명확하게는 금하지 않으며, 그 문제에 대해 결정적으로 말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 “조소당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방 종교의 유지에 기여한다고 여긴 것이다.
모든 우상 숭배와의 접촉을 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그림으로 화상畵像을 표시하는 것에 관한 랍비들의 견해는 매우 흥미 있는 예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백성의 외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두 시기(만약 세 시기가 아니라면)를 구분한다. 가장 초기의 가장 엄격한 의견은 하늘이나 땅이나 물 속의 어떤 것도 재현하는 것을 완전히 금했다. 그러나 미쉬나19는 미묘하게 구분함으로써 이런 금지를 다소 완화한 것으로 보이며, 이런 입장은 뒤에 탈무드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런 엄격한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경건한 감정이 자신들의 통치자에 의해 공공연히 짓밟히는 것이 특히 괴로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하스몬 왕조the Hasmoneans의 알렉산드라Alexandra, 공주이자 왕비인 헤롯의 장모는 자기 집안의 전통을 완전히 망각한 채, 수치스런 목적으로 자기 아들과 딸의 초상화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냄으로 자기의 야심 찬 계획에 그를 끌어들이려 한 일조차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 둘 칼리굴라의 입상을 제작할 때, 유대인 중에서는 그 입상을 제작할 기술자를 찾을 수 없어서 그 일이 베니게 사람에게 맡겨진 사실을 보면, 알렉산드라의 아들과 딸의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궁전을 장식한 “형상들”, “물이 뿜어져 나오는” 정원의 “청동 입상들”,21 또한 가이사랴의 어마어마한 입상들, 그리고 아그립바가 죽은 후 세바스테와 가이사랴의 군대에 의해 그렇게 수치스럽게 능욕당한 아그립바의 세 딸의 입상23을 제작한 사람이 바로 이 외국인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이교주의와의 접촉 회피
우상 숭배와 관련된 모든 증오의 감정과 비유대교적인 모든 조소의 태도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조문에 대한 설명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다. 유대는 로마의 권력에 복종해야 했지만, 적어도 현자들의 학문에서는 복수할 수 있었다. 유대교의 현자들이 로마와 그리스 철학자들을 쉽게 논박하는 이야기를 열거하자면 거의 한이 없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에서는 한 황제안토니누스, Antoninus가 한 랍비 앞에서 항상 자기를 낮추며 매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고 묘사된다.
다니엘의 네 번째 짐승 인 로마는, 온 땅의 메트로폴리스가 될25 예루살렘이 앞으로 올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악행을 거짓으로 변명하지만 허사일 것이다.26 그러나 로마는 언어와 글을 그리스에서 취했으며 왕위가 세습적으로 계승되지도 않았으므로 세상적인 근거에서도 조롱거리였다. 그 무서운 로마에 대한 평가가 이러했다면, 다른 나라에 대한 조롱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지 않았다면, 온 세상은 파괴되었을 것이며 땅은 “두려워해야”28 했다. 그런데 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억지로 그 일에 밀어 넣으셨지만, 그 다행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세상은 다시 한번 “잠잠해”졌다. 하와와 뱀의 부정한 연합의 결과로 인류에게 붙은 부정에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정결케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민족에게는 여전히 그 부정이 붙어 있다!11)
우선 모든 이방의 어린이는 출생 직후부터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산, 언덕, 덤불 등을 숭배하는, 요컨대 기괴한 우상 숭배자들은 칼로 베어짐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교주의를 근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랍비 법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어떤 분명한 목적에 유의했다. 유대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 이교도의 예배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방인에게 기쁨이나 도움을 주지 않는 것.
그런데 이 마지막 목적은 가장 위험한 원칙을 담고 있어서, 광신적인 믿음에 의해 거의 무한히 적용될 수 있었다. 심지어 미쉬나까지도, 이방인 어미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녀의 아기를 먹이는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아기 기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12)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교도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물론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어서도 안 되었다. 어떤 교사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정도다. “이방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 죽이라. 뱀 중에서 가장 좋은 놈, 그 머리를 부수라.” 이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은 광신적인 믿음이었는데, 이단자, 배반자, 유대교 신앙을 떠난 자들은 실제의 위험 속으로 던져져야 하며, 만약 그들이 그런 위험 속에 있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사람들과는 어떤 교제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생명이 위험할 때 그들의 의료적 도움을 받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13)왜냐하면 이단자와 무엇을 같이 하는 사람은 그와 하나가 될 급박한 위험에 처하게 되며, 이단자가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더라도 그는 즉시 죽어야 하는데, 부분적으로는 자기의 죄를 속하기 위함이고 부분적으로는 다시 그 죄에 빠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모든 생각이 끔찍해 보이겠지만, 이런 생각은 더 개명되었다고 알려진 시대에 행해진 광신보다는 덜 악했을 것이다. 공정한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가르침이 당시의 상황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당시의 그런 사실들을 기록해야 한다.15)
사실 그대로 말하면,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해서 가졌던 지독한 증오는 이방인의 성격에 대한 평가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가장 사악하며, 심지어 본성에 어긋나는 죄악들이 이방인에게 전가되었다. 이방인에게 양떼를 맡기거나, 그들의 여인에게 아기를 돌보게 하거나, 그들의 의사에게 환자를 돌보게 하거나, 이유 없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한 사전 대비 없이 그들 사이를 걸어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했다. 불가피한 경우나 사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그들을 완전히 피해야 했다.
그들이나 그들의 것은 부정했다. 그들의 집에는 우상이 있거나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 있으므로 그들의 집은 부정했다. 그들의 잔치, 그들의 즐거운 때, 그들과의 접촉 자체도 우상 숭배에 의해 오염되었다. 만약 이교도를 방에 혼자 남겨 둔다면, 그는 무절제하거나 부주의하여 식탁 위의 포도주나 고기, 창고의 기름이나 밀을 부정하게 만들 위험이 항상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의 축제 사흘 전에는 (혹은 사흘 후에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는 일을 피하기 위해 모든 사업상의 거래가 금지되었다. 유대인은 우상 숭배의 축제가 벌어지는 도시를 지나가지 말아야 했으며, 우상 숭배에 바쳐진 나무 그늘에는 앉지도 말아야 했다. 그 나무에서 나온 장작도 오염되었다. 만약 그 장작으로 빵을 구웠으면 그 빵도 부정했다. 그 나무로 직조기의 셔틀shuttle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이용하여 짠 모든 옷감이 금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옷감이 다른 옷감과 혼합되거나 혹 그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이 다른 옷과 함께 사용되었다면, 그 전체가 부정했다.
유대인 장인은 바실리카나 스타디움 혹은 이교도가 법적인 판결을 선언하는 자리를 만들 수 없었다. 이방인에게 집이나 밭을 빌려 주거나, 혹은 양떼를 파는 것은 물론 위법이었다. 유대인이 그 자리에서 지켜보지 않은 것이라면, 이교도가 따른 우유나 그들이 준비한 빵이나 기름은 위법이었다. 이교도의 포도주는 완전히 금지되었다.16) 이교도의 것에는 단지 닿기만 해도 전체가 오염되었다. 아니 이교도의 포도주에 코를 들이대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런 세부 사항을 열거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하지만 랍비들의 이런 고집불통이 다른 종파보다 더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 체계에서는 고통스러운 논리적 필연성이었으며, 그들 마음으로는 이것에 가끔씩 반항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런 반항은 이스라엘의 끔찍한 역사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설명되었다고 부언할 수 있다.
에더스하임알프레드, 복음을 위한 준비; 탄생에서 세례까지, ed. 황을호 et al., trans. 황영철 and 김태곤, 1판 ed., vol. 1, 메시아 -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시대 (서울 종로구 송월동 32-43(110-101): 생명의말씀사, 2012), 19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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