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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레스타인적 유대교(Palestinian Judaism)와 헬라적 유대교(Hellenistic Judaism) - 캐롤라인 오시에크
    고대 근동 문화 2023. 6. 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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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적 유대교(Palestinian Judaism)와 헬라적 유대교(Hellenistic Judaism)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은 소위 팔레스타인적 유대교와 헬라적 유대교라 불리는 것들 사이의 차이점과 관계된다.

     

    아래 글 참조 <클릭>

    https://iknewitnow.tistory.com/34

     

    신약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적어도 6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 외에도 상당히 많은 유대인 거주지들이 있었다. 특히 이집트와 바벨론에 많이 있었다.

     

    지중해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이 있은 후에 점차적으로 헬라화되어 가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처럼 그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며 고향 도시(예루살렘)와 성전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집트, 북 아프리카, 시리아,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들에서, 이들은 헬라 세계 속에서 살면서 점차적으로 그 세계에 동화되었다. 적어도 기원전 3세기가 되었을 때는 이집트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아주 일찍이 자녀들에게 헬라식 이름을 지어주고 스스로를 최대한으로 그들의 환경에 동화시켰만, 또한 동시에 모세와 아브리함의 종교에도 충실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교만이 헬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다소 덜 받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진 마틴 헹겔(Martin Hengel)의 철저하고 기념비적인 연구는 전혀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헹겔은 두 권으로 된 저서 『유대교와 헬레니즘』(Judaism and Hellenism)–이책에 이어 좀더 작은 저서인 Jews, Greeks, and BarbariansThe “Hellenization” of Judaea in the First Centuries after Christ가 나왔다–에서 문학적 증거, 고고학적 증거, 비문의 증거를 철저하게 검토했다.

    그 결과 그는 이미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라 유대교 사이에는 의미있는 구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오히려 이미 그 때에는 헬레니즘이 일상 생활 속에 깊숙히 파고든 상태였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그 외양에 있어 디아스포라의 형제 자매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그들의 모국어는 헬라어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생활 속에는 헬라의 경제적, 행정적, 문화적 영향들이 깊이 침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헹겔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라(디아스포라)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헬라어를 말하는 팔레스타인 서부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아람어/히브리어를 말하는 팔레스타인과 바벨론 지역의 유대교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유대교는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 헬라 문명과 문화의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욥기와 잠언 등에서 이미 철학적 명상쪽으로 향하고 있던 유대교의 지혜 문학 전승은 헬라 문학에서, 특별히 대중적인 스토아주의에서 유사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었다. 유대교의 지혜 전승은 생활 양식이자 인격화된 안내자로서(잠언 8–9장, 시락서 24장을 보라) 지혜를 토라, 즉 율법과 동일시함으로써(시 119편을 보라) 헬라의 철학적 저술들을 숭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 신빙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코헬렛(Qoheleth, 전도서)과 벤 시라(Ben Sira, 집회서) 같은 책은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본보기들이었다. 헬라 철학이 유대교의 지혜 문학에 미친 영향이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약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 과정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헹겔은 보다 덜 의식적인 헬라문화의 차용인들(하지만 차용인들이기는 마찬가지인)이 있었으며, 그들은 엣센파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쿰란 공동체의 사해 사본을 만든 분파였다. 이미 인정되고 있는 이론에 의하면, 이들은 기원전 150년경에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았던 성전 정책들에 반대하여 이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엄격하고, 공동체적인 조직을 이루고 있었으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유대교의 합법적인 대표자들임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헹겔은 이러한 이들의 태도는, 금욕주의와 공동체적인 생활로 유명했던, 이보다 훨씬 전부터 해 왔던 피타고라스파 철학자들의 비밀 단체들과 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엣센파(쿰란) 공동체의 외적 형태와 조직은 헬라의 사종교 단체와 매우 유사했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는 이전 유대교에서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형태의 조직을 하고 있었다. 헹겔은 유대 순수주의자들이었던 엣센파 사람들이 헬라의 종교 형태들을 직접적으로 빌려왔다는 이전 학자들의 주장을 지혜롭게 거부한다. 그러면서 헹겔은 엣센파 사람들조차 이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최선의 의도에 역행하여 적어도 헬라적인 테두리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헹겔은 헬레니즘이 팔레스타인에 미친 전반적인 영향들에 대해 놀라운 주장들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헹겔은 헬레니즘의 언어와 문학와 여가 활동 등의 지대한 영향을 언급할 때 이는 대부분 예루살렘의 귀족 계급들에 대한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불행히도, 고대 세계 전체를 통해 스스로 최선의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던 도시 계층민들이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기록을 남길 만한 시간과 돈이 있었던 사람들은 이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역, 세금, 정치 등에 있어 헬레니즘의 영향은 대단히 지배적이었다.

     

     캐롤라인 오시에크, 신약의 사회적 상황, trans. 김경진, 초판., vol 1, 21세기 신학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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